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문단 편집) ===== 스웨덴의 반격과 덴마크의 전쟁 이탈 ===== 이제 프레데리크 4세는 AD 1700년 3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공격하여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가 있는 퇴닝을 포위했다. 비슷한 시기에 아우구스트 2세도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공격하여 리가를 포위했다. 그러나 스웨덴 함대가 덴마크의 외레순 해협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스웨덴 육군 10,000명을 셸란 섬이 상륙시키면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도 전년도에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독립을 보장한 바 있었고 [[스페인 국왕|스페인 왕위]]까지 계승하려는 [[부르봉 왕조|프랑스 부르봉 왕가]]와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AD 1701년 ~ AD 1714년)이 임박하여 발트해까지 전쟁에 휩싸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함대도 덴마크로 향하여 스웨덴 함대와 함께 7월 20일부터 26일까지 코펜하겐을 공격했다. 이에 놀란 프레데리크 4세가 강화 협상을 제안하자 일단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함대가 물러났다. 그리고 AD 1700년 8월 '트라벤달 조약'이 체결되면서 덴마크가 스웨덴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스웨덴의 적대국과도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덴마크도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하고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으로부터 전쟁 배상금으로 260,000 라이히스탈러(Reichstaler; 은화)을 지급받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덴마크는 대북방전쟁에서 이탈했고 칼 12세는 스웨덴군을 이끌고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구원하기 위해서 떠났다. 그리고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도 AD 1700년 10월 잉그리아로 들어가 [[나르바]]를 포위하면서 대북방전쟁의 전장이 발트해 동부 지역으로 옮겨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